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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페루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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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46년~1523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 본명은 피에트로 바누치(Pietro Vannucci)이다. 그는 움브리아주 치타디피에베에서 태어나 페루자에서 활동했으며, 1481년에는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제작하는 등 로마에서도 활동했다. 페루지노는 유화 기법을 초기부터 사용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등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열쇠의 인도》, 《피에타》, 《성모의 결혼》 등이 있으며, 캄비오 궁전 청중 회의실 장식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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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페루지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자화상, 1497–1500
자화상, 1497–1500
본명피에트로 반누치
출생1446년 경
출생지치타델라피에베, 교황령 (현재 움브리아주, 이탈리아)
사망1523년
사망지폰티냐노, 교황령 (현재 움브리아주, 이탈리아)
국적이탈리아
활동 내역
분야회화
프레스코
사조이탈리아 르네상스
스승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주요 작품
대표작《천국의 열쇠를 주다》

2. 초기 생애

피에트로 페루지노는 1481년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로셀리 등과 함께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제작한 르네상스 전성기를 이끈 화가 중 한 명이다. 움브리아 지방 출신으로,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교회의 열쇠를 받는 성 베드로>는 큰 호평을 받았다. 1493년1497년 사이에는 피렌체페루자에 화실을 두고 성모자상 연작을 이탈리아 각지로 보냈다. 1500년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는 페루지노를 이탈리아 최고의 화가라 칭송했으며, 라파엘로는 이 무렵 그의 제자였다. 1495년에 제작한 <피에타>는 조용하고 한적한 움브리아 지방의 풍경을 배경으로 관상과 정감에 넘친 비극을 담고 있으며, 각 인물의 두부와 신체는 산비탈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2. 1. 출생 및 가문

피에트로 바누치(Pietro Vannucci)는 크리스토포로 마리아 바누치(Cristoforo Maria Vannucci)의 아들로 움브리아(Umbria)주 치타디피에베(Città della Pieve)에서 태어났다.
치타디피에베(Città della Pieve)
그의 별명은 움브리아(Umbria)의 주요 도시인 페루자(Perugia) 출신임을 나타낸다. 학자들은 바누치 가족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대해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바누치가 빈곤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그의 가족이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였다고 주장한다.[5]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와 조반니 산티(Giovanni Santi)가 언급한 그의 사망 당시 나이를 바탕으로, 1446년과 1452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5]

2. 2. 피렌체에서의 수학

피에트로 바누치는 크리스토포로 마리아 바누치의 아들로 움브리아(Umbria)주 치타디피에베(Città della Pieve)에서 태어났다. 그의 별명은 움브리아(Umbria)의 주요 도시인 페루자(Perugia) 출신임을 나타낸다. 학자들은 바누치 가족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대해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바누치가 빈곤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그의 가족이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였다고 주장한다.[5]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와 조반니 산티(Giovanni Santi)가 언급한 그의 사망 당시 나이를 바탕으로 1446년과 1452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5]

피에트로는 바르톨로메오 카포랄리(Bartolomeo Caporali)나 피오렌초 디 로렌초(Fiorenzo di Lorenzo) 등 페루자의 지역 작업장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5] 첫 번째 피렌체 체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일부는 1466년에서 1470년 사이로 추정하고, 다른 이들은 1479년으로 보기도 한다.[5] 바사리에 따르면, 그는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의 작업실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로렌초 디 크레디(Lorenzo di Credi), 필리피노 리피(Filippino Lippi) 등과 함께 견습생으로 일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는 그에게 투시(perspective (graphical)) 기법을 가르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1472년에는 이미 견습 과정을 마쳤을 것이며, 성 루카 동업조합(Confraternity of St Luke)에 장인으로 등록되었다. 피에트로는 매우 재능이 있었지만,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는 그다지 열정적이지 않았다.[6]

페루지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초기의 유화(oil painting) 기법 사용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 중 일부는 피렌체 포위전(1529–1530)(Siege of Florence (1529–1530)) 동안 파괴된 잉게사티(Ingessati) 수도원을 위한 대규모 프레스코화(fresco)였다. 그는 또한 뛰어난 효과를 지닌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로 제작된 많은 만화를 만들었다. 템페라(tempera) 기법으로 된 그의 초기 스타일의 좋은 예는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에 있는 "성인들 사이에 앉아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라는 제목의 ''톤도''(원형 그림)이다.

3. 로마에서의 활동

페루지노는 피렌체에서 페루자로 돌아와 페루자 산타 마리아 데이 세르비 교회를 위한 ''동방박사 경배''(약 1476년)를 그렸다. 1480년경, 시스토 4세 교황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가서 시스티나 성당 벽에 프레스코화 패널을 그리게 된다.

1486년1499년 사이에는 주로 피렌체에서 활동했고, 로마와 페루자로 여러 번 여행을 했으며, 페루자에 두 번째 작업실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피렌체에 확고한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의뢰를 받았다.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그의 피에타 (1483~1493)는 페루지노의 때로는 지나치게 쉬운 감상적인 경건함을 피하는, 특이할 만큼 단조로운 작품이다.

바사리에 따르면, 페루지노는 1493년 9월 건축가 루카 판첼리의 딸 키아라와 결혼하기 위해 피렌체로 돌아왔다.[7] 같은 해 피렌체를 그의 영구적인 거주지로 삼았으나,[8] 다른 곳에서 일부 작업을 계속 수락했다.

3. 1. 시스티나 성당 벽화

1481년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로셀리 등과 함께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 제작에 참여했다. 르네상스 전성기를 이끈 화가 중 한 명으로, 움브리아 지방 출신이다.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교회의 열쇠를 받는 성 베드로>는 호평을 받았다.[7]

''열쇠의 인도'' 프레스코화, 1481~1482년, 시스티나 성당, 로마


1480년경 시스토 4세 교황의 부름을 받아 시스티나 성당 벽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페루지노가 제작한 프레스코화에는 ''모세''와 ''십보라''(종종 루카 시뇨렐리의 작품으로 여겨짐), ''그리스도의 세례'', ''열쇠의 인도''가 포함된다. 핀투리키오는 페루지노와 함께 로마에 가서 그의 파트너가 되어 수익의 3분의 1을 받았다. 그는 십보라 주제의 일부를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화는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고르네상스 위촉 작품이었다. 제단 벽에는 승천, 탄생, 갈대 속의 모세가 그려져 있었으나, 나중에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파괴되었다.

4. 피렌체와 페루자에서의 활동

1481년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로셀리 등과 함께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제작한 화가 중 한 명으로, 르네상스 전성기를 이끈 움브리아 지방 출신이다.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교회의 열쇠를 받는 성 베드로>는 호평을 받았다. 1493년~1497년 사이에는 성모자상 연작을 이탈리아 각지로 보냈다. 1500년경에는 로마의 은행가 아고스티노키지로부터 이탈리아 최고의 화가라는 칭송을 받았다. 라파엘로는 이 무렵 페루지노의 제자가 되었다. 1495년에 제작한 <피에타> (피렌체, 피티)는 조용하고 한적한 움브리아 지방의 풍경을 배경으로 관상과 정감에 넘친 비극을 담고 있으며, 각 인물의 두부와 신체는 산비탈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5]

페루지노는 피렌체에서 페루자로 돌아와 페루자 산타 마리아 데이 세르비 교회를 위한 ''동방박사 경배''(약 1476년)를 그렸다. 1480년경 시스토 4세 교황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가서 시스티나 성당 벽에 프레스코화 패널을 그렸다. 그가 그곳에서 제작한 프레스코화에는 ''모세''와 ''십보라''(종종 루카 시뇨렐리의 작품으로 여겨짐), ''그리스도의 세례'', 그리고 ''열쇠의 인도''가 있다. 핀투리키오는 페루지노와 함께 로마로 가서 그의 파트너가 되었으며, 십보라 주제의 일부를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화는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고르네상스 위촉 작품이었다. 제단 벽에는 승천, 탄생, 갈대 속의 모세가 그려져 있었으나, 나중에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위해 파괴되었다.[6]

1486년과 1499년 사이에 페루지노는 주로 피렌체에서 활동했고, 로마와 페루자로 여러 번 여행했다. 그는 피렌체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의뢰를 받았다.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그의 피에타 (1483~1493)는 페루지노의 작품 중에서도 단조로운 작품으로 꼽힌다.[7] 바사리에 따르면, 페루지노는 1493년 9월 건축가 루카 판첼리의 딸 키아라와 결혼했다.[7]

4. 1. 캄비오 궁전 청중 회의실 장식

1499년, 페루자의 환전상 조합은 페루지노에게 캄비오 궁전 청중 회의실 장식을 의뢰했다. 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마투란치오가 자문을 맡았다. 1500년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작업에는 천장에 일곱 개의 행성과 황도대 별자리를 그리고, 벽면에는 성탄과 변용을 묘사한 두 점의 성화가 포함되었다. 또한 전능하신 아버지, 추기경 미덕인 정의, 신중, 절제, 용기, 지혜의 상징인 카토, 고대 현자, 예언자, 시빌들의 실물 크기 인물들도 포함되었다.[9] 페루지노는 회의실 중앙 기둥에 자신의 흉상 초상화를 배치했다. 라파엘로가 천장 작업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9]

5. 후기 활동 및 사망

미켈란젤로가 페루지노에게 그의 예술이 서툴다고 말하자, 바누치는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실패했다.[9] 이 일로 자극받은 그는 파비아의 세르토사 수도원을 위해 "성모와 성인들"을 제작했는데, 현재는 분해되어 여러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9] 세르토사 수도원에 남아 있는 유일한 부분은 "천사들과 함께하는 성부"이다.[9] "수태고지"는 사라졌고,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성모, 미카엘 천사, 토비아와 함께하는 라파엘 천사" 세 개의 패널은 런던 국립 미술관의 보물 중 하나이다.[9] 1504년부터 1507년까지 필리피노 리피를 대신하여 아눈치아타 성당의 제단을 위해 아눈치아타 제단화를 제작했지만, 혁신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9] 페루지노는 제자들을 잃었고, 1506년경 피렌체를 떠나 페루자로, 그리고 1, 2년 후 로마로 갔다.[9]

율리우스 2세는 페루지노를 불러 바티칸 시국 보르고 화재 방의 벽화를 그리게 했다.[9] 그러나 그는 곧 페루지노에게서 교육받은 라파엘로를 선호했고, 바누치는 다섯 개의 메달리온 그림에 "성부"의 모습을 그린 천장을 완성한 후 1512년 로마에서 페루자로 은퇴했다.[9] 그의 후기 작품들 중 많은 작품들이 반복적인 작업실의 일상으로 쇠퇴했지만, 가장 좋은 작품 중 하나는 페루자 산 아고스티노 교회의 대형 제단화(1512년에서 1517년 사이에 제작)로, 현재는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다.[9]

바티칸 시국 보르고 화재 방 천장에 있는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성부와 천사들"


페루지노의 마지막 프레스코화는 트레비의 마돈나 델레 라크리메 교회(1521년, 서명 및 연도 기재), 페루자의 산타녜세 수도원, 그리고 1522년 포르티냐노 성의 교회에 그려졌다.[9] 두 연작 모두 원래 위치에서 사라졌고, 두 번째 연작은 현재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 있다.[9] 그는 1523년 흑사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폰티냐노에 있었으며, 다른 흑사병 희생자들처럼 서둘러 성지가 아닌 곳에 매장되어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다.[9]

바사리에 따르면 페루지노는 종교심이 거의 없었고 영혼의 불멸성을 공개적으로 의심했다.[9] 페루지노는 1494년 자신의 초상화(현재 우피치 미술관 소장)를 그렸는데, 거기에 "두려워하라 하나님을"(계시록 14:7)이라는 제목의 두루마리를 넣었다.[9] 페루자 캄비오 궁전의 후기 초상화는 같은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더해져 있다.[9] 페루지노는 상당한 재산을 남기고 세 아들을 남긴 채 사망했다.[9]

"피에타"


1495년 그는 피렌체 산타 키아라 수녀원(피티 궁전)을 위해 "성모의 애도"에 서명하고 날짜를 기입했다.[9] 1496년경 그는 1493년 피렌체 마리아 마달레나 데이 파찌를 위해 의뢰받은 십자가 처형 장면("파찌 십자가 처형 장면")을 프레스코화했다.[9] 현재 박물관에 있는 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결혼식 그림("스포살리치오")의 페루지노 작품 귀속은 논란이 있으며, 로 스파냐의 작품으로 여겨진다.[9] 페루지노의 "그리스도의 승천" 폴립티크(페루자 시립 박물관, 리옹)는 1496년에서 1498년경 페루자 산 피에트로 교회를 위해 그린 것이다.[9] 이 제단화의 다른 부분들은 다른 미술관에 흩어져 있다.[9]

치타 델라 피에베의 디시플리나티 예배당에는 6.5m의 정사각형 "동방박사의 경배"가 있는데, 1505년에 제작되었으며 바누치의 제자들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9] 1507년, 그는 "성 제롬과 성 프란체스코 사이의 성모"를 제작했는데, 현재는 팔라초 페냐에 있다.[9] 피렌체 산 오노프리오 교회에는 마지막 만찬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는데, 라파엘로의 작품이라고도 여겨지지만, 움브리아 거장의 다른 제자의 작품일 가능성이 더 크다.[9]

그의 제자들로는 라파엘로, 폼페이오 코키,[9] 에우세비오 다 산 조르조,[9] 마리아노 디 에우스테리오,[9] 그리고 조반니 디 피에트로(로 스파냐)가 있다.[9]

6. 작품의 특징

페루지노는 인물 묘사에서 다소 감상적이고 유형적인 경향을 보였지만, 우아하고 고상한 표현이 특징이다. 특히 피렌체 팔라티나 미술관에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종교화라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감미롭고 관능적인 여성상으로 묘사되었다.[6] 또한, 페루지노가 그린 인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과 비교하여 윤곽선이 명확하다.[6]

페루지노는 이탈리아에서 초기에 유화(oil painting) 기법을 사용한 화가 중 한 명이었다.[6] 템페라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초기 스타일의 좋은 예로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톤도(원형 그림)인 "성인들 사이에 앉아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가 있다.[6]

7. 주요 작품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세바스티아누 사이에 앉아 있는 성모자'', 1493


''아폴론과 마르시아스''


페루지노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열쇠의 인도'' (1481–1482) — 프레스코화, 335 × 600 cm, 시스티나 성당, 바티칸 시국
  • ''십자가에 못 박힘'' (갈리친 3폭 제단화, 1480년대) — 산 지미냐노의 산 도메니코를 위해 그려짐, 워싱턴 국립 미술관
  • ''피에타'' - 패널에 유채, 168x176 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피에솔레의 성 로물루스 대성당'' - 제단화, 피에솔레, 이탈리아
  • ''파노의 수태고지'' - 패널에 유채, 212x172 cm, 산타 마리아 누오바 교회, 파노
  • ''로렌초 디 크레디의 초상'' (1488) - 패널에 유채, 캔버스로 옮겨짐, 국립 미술관, 워싱턴, D.C.
  • ''성 세바스티아누'' — 패널에 유채, 174 × 88 cm, 국립박물관, 스톡홀름
  • ''성 세바스티아누'' — 패널, 176 × 116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성 세바스티아누'' (1490년 이후) — 목판에 유채, 110 × 62 cm,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 ''성 베르나르두스에게 나타나시는 성모'' — 목판에 유채, 173 × 170 cm, 알테 피나코테크, 뮌헨
  • 알바니 토르로니아 제단화 (1491) - 패널에 템페라, 174 x 88 cm, 토르로니아 컬렉션, 로마
  •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세바스티아누 사이에 앉아 있는 성모자 ''(1493) - 패널에 유채, 178x164 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성 세바스티아누'' (1493–1494) — 패널에 유채와 템페라, 53.8 × 39.5 cm, 에르미타주, 상트페테르부르크
  • ''프란체스코 델레 오페레의 초상'' (1494) - 패널에 유채, 52 x 44 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파비아의 체르토사 제단화'' (1496–1500) - 패널에 유채, 52 x 44 cm, 국립 미술관, 런던
  • 데켐비리 제단화 (1497) -패널에 유채, 193x165 cm, 바티칸 핀나코테카, 로마
  • 파노 제단화 (1497) -패널에 유채, 262x215 cm, 산타 마리아 누오바 교회, 파노
  • ''산 프란체스코 알 프라토 부활'' -패널에 유채, 233x165 cm, 바티칸 핀나코테카, 로마
  • 발롬브로사 제단화 (1500) -패널에 유채, 415x246 cm, 아카데미아 미술관, 피렌체
  • 테지 제단화 -패널에 유채, 180x158 cm, 움브리아 국립 미술관, 페루자
  • ''성인들과 함께 영광 속의 성모'' -패널에 유채, 330x265 cm, 볼로냐 국립 미술관
  • ''성모의 결혼'' (1500–1504) — 목판에 유채, 234 × 185, 캉 미술관,
  • ''기둥에 묶인 성 세바스티아누'' — 캔버스에 유채, 181 × 115 cm, 상파울루 미술관, 상파울루, 브라질
  • ''사랑과 순결의 싸움'' (1503) — 캔버스에 템페라, 160 x 191 cm, 이사벨라 데스테 스투디오, 루브르 박물관, 파리를 위해 제작됨
  • 수태고지 폴립티크 (1504–1507) – 패널에 유채, 334 x 225 cm (중앙 패널), 아카데미아 미술관 및 아눈치아타, 피렌체
  • ''성탄: 아기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성모, 성 요셉, 그리고 목자들'' — 프레스코화 캔버스로 옮겨짐, 폰티냐노의 산타 마리아 아순타에서, 254 x 594 cm,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런던
  • ''그리스도의 승천'' (산세폴크로 제단화;) - 패널에 유채, 332.5 x 266 cm, 산세폴크로 대성당
  • ''성 바르톨로메오'' (1512–1523) – 패널에 유채, 89 x 71 cm, 폴립티크의 일부, 버밍엄 미술관
  • 가나의 혼인(움브리아 국립미술관 소장)
  • 성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수여하다 1481년-1482년 시스티나 성당[12]
  • 파찌 십자가 처형 장면
  • 동방박사의 경배
  • 겟세마네의 기도
  • 그리스도의 애도
  • 막달라 마리아
  • 갈리친 삼폭제단화
  • 산 프란체스코 알 프라토의 부활
  • 소년의 초상
  • 젊은 남성의 초상
  • 데첸비리 제단화
  • 성모의 성 베르나르두스에게의 발현


그 외 다수

8. 영향

페루지노는 라파엘로를 비롯한 많은 제자를 양성했으며, 라파엘로의 초기 작품에는 페루지노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9] 페루지노의 다른 제자로는 폼페이오 코키,[9] 에우세비오 다 산 조르조,[9] 마리아노 디 에우스테리오,[9] 조반니 디 피에트로(로 스파냐) 등이 있다.

1499년 페루자의 환전상 조합은 페루지노에게 캄비오 궁전 청중 회의실 장식을 의뢰했는데, 이 작업에는 라파엘로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1500년에 완성된 이 프로젝트는 천장에 일곱 개의 행성과 황도대 별자리를 그리고, 벽면에 성화 2점(성탄, 변용)을 묘사했으며, 페루지노는 회의실 중앙 기둥에 자신의 흉상 초상화를 배치했다.[9]

미켈란젤로는 페루지노의 예술을 "서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9] 1504년부터 1507년까지 페루지노는 필리피노 리피를 대신하여 아눈치아타 성당의 아눈치아타 제단화를 제작했지만, 혁신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1506년경 페루지노는 제자들을 잃고 피렌체를 떠나 페루자를 거쳐 로마로 갔다.[9]

율리우스 2세는 페루지노에게 보르고 화재 방의 벽화를 그리도록 했지만, 곧 라파엘로를 더 선호했다. 페루지노는 천장에 "성부"를 그린 후 로마에서 은퇴했다.[9]

참조

[1] 사전 Perugino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2019-06-23
[2] 웹사이트 Perugino https://www.collinsd[...] HarperCollins 2019-06-23
[3] 사전 Perugino Merriam-Webster 2019-06-23
[4] 서적 Lives of Seventy of the Most Eminent Painters, Sculptors and Architects https://books.google[...] C. Scribner's sonsGeorge Bell and Sons 2024-03-14
[5] 서적 Pittori del Rinascimento Scala
[6] 학술지 Pietro Perugino 1900-03-11
[7] 서적 The Complete Work of Raphael Reynal and Co., William Morrow and Company 1969
[8] 서적 The Complete Work of Raphael Reynal and Co., William Morrow and Company 1969
[9] 서적 Catalogo dei quadri che si conservano nella Pinacoteca Vannucci in Perugia https://books.google[...] Galleria Nazionale dell'Umbria
[10] 웹사이트 損保ジャパン東郷青児美術館 〔特別展〕 甘美なる聖母の画家 ペルジーノ展~ラファエロが師と仰いだ神のごとき人~ https://web.archive.[...]
[11] 웹사이트 徳島県立近代美術館 https://web.archive.[...]
[12] 서적 西洋美術史入門 筑摩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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